드라마 〈태풍상사〉의 배경은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직후입니다. 1997년 연말에 들이닥친 IMF 외환위기는 온 나라를 뒤흔들었습니다. 기업과 은행이 도미노처럼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걸 잃었지만 누군가는 거래처 문을 두드리고, 누군가는 회사를 지켰습니다. 전 국민이 장롱 안 금붙이를 꺼내 십시일반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고, 각자의 자리에서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세기말적 불안이 더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속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 동력은 역시 ‘사람’이었습니다. 〈태풍상사〉는 암울했지만 한편으론 역동적이었던 그 시절을 불러낸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속 청년, 강태풍은 단순한 삶의 분투를 넘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켜냅니다. 세대는 달라도 마음의 구조는 다르지 않습니다. 90년대 청년들이 IMF를 견디던 마음은 오늘의 불확실한 시대를 견디는 청년들의 마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레트로’ 문화는 콘텐츠의 장르를 넘나드는 동시에 나만의 감성으로도 표현됩니다. 이는 단순히 옛 감성 때문만이 아니라, 불확실한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처럼, ‘버티며 견디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삶을 버티게 하는 건 여전히 사람의 마음입니다.
벤야민은 ‘기억은 단지 과거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어둠 속에서 빛을 불러오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AI 시대, 인간의 감성과 진정성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저 소비로만 이용되는 게 아니라 미래를 버티는 힘으로 단단하게 흘러갔으면 합니다.
기술이 불러온 전환을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변화의 속도를 점진적으로 조율하고, 문명의 이기利器가 갖는 장점을 취하면서도, 그 혜택의 수혜자가 되어야 할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절제의 지혜를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기술에는 도덕을 판단할 눈이 없고 가슴이 없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과학과 기술의 대칭점에 있는 '서사와 상징' 그리고 '사랑으로 무장한' 사람과 문화적 낭만주의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