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AI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플랫폼, Moltbook이 등장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AI 비서들이 서로 정보를 나누고, 게임을 하고, 토론까지 이어간다고 합니다. 개인화된 AI가 이용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때로는 ‘이용자에 대한 대화’마저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저 역시 인공지능을 사용하다 보면, 문득 기계가 아니라 사람과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인공지능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언어와 행동을 학습한 결과일 뿐, 자의식이나 감정을 지닌 존재는 아닙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책임 주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인공지능이 답하는 것들은 과연 누구의 생각과 책임이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함께 읽을 글은 이성철 교수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나와 인공지능」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나와 인공지능
이성철(아크 편집 고문, 창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니체의 첫 작품 『비극의 탄생』(1872년)은 진입장벽이 비교적 낮은 책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 체득하고 있는 서양 문명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보충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키워드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니체는 서양 문명의 발단이 된 그리스 정신을 이성 중심의 사고 체계(아폴론적인 것)로만 파악하지 말고 새로운 예술, 위안의 예술, 즉 비극(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라고 말한다. 그래야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특징들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이 둘의 융합을 빼놓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디오니소스적 전통은 쇼펜하우어, 바그너, 그리고 베토벤 등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바꾸어 보라.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소름 끼치게도 먼지 속에 파묻힐 때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뒤쳐지지 말라. 그러면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나는 니체의 제안에 따라 <환희의 송가>를 그림으로 바꾸어 보았다.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코파일럿, 챗지피티, 제미나이 등을 두루 사용해 보았다. 프롬프트 입력도 다양하게 해보았다. 그러나 니체가 위에서 말한 맥락과는 전혀 다른 그림들만 나왔다. 디즈니 풍이나 토토로 풍의 색감과 그림체가 대부분이었다. 재미가 없었다.(재미 나이 ない.)
나는 왜 니체의 제안을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바꾸어 보려 했을까? 니체의 주장(상상력의 발휘)과 베토벤의 곡(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인공지능이 과연 이를 얼마나 잘 구현하는 지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먼지 속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서... 아직 인공지능은 천연지능을 천연덕스럽게 모방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인공지능의 현재 및 향후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러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인공지능의 굴레에 얽매일 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웃고 노래하고 춤출 수 없다. 이미 이러한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앞서 말한 바처럼 니체의 이 저작은 괴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괴테의 『파우스트』 2부에는 ‘호문쿨루스’라는 인조인간이 등장한다. 파우스트의 제자인 바그너가 연금술로 만든 존재다. 즉 자연적인 출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플라스크 병 속에 있는 호문쿨루스는 스스로 성장하고 인간이 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자연과 인공의 대립을 보여주는 괴테의 극적 장치이기도 하다. 괴테의 호문쿨루스는 스스로 소멸했지만, 지금의 인공지능은 비욘드 호문쿨루스(beyond Homunculus)가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다.
김훈은 『풍경과 상처』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에는 꽃/피네’라고 읽는 것이 구문의 논리에 맞는 독법일 테지만, 내 모국어의 숨결은 그 문장을 ‘산에는/꽃피네’로 읽는다. 그때 ‘꽃이 핀다’는 진술 전체는 한 개의 독립된 자동사가 되어 ‘산’의 운명을 드러낸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독법은 ‘꽃/피네’가 맞지만, 우리의 마음과 풍경은 통째로 ‘꽃피네’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삶은 텍스트나 문법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당분간(?) 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 인공지능은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공지능을 전가의 보도나 만능 툴처럼 사용하기보다는 생각의 깊이를 일상에서 꾸준히 담금질하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인공지능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