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는 그의 마지막 저작인 『새로운 질서』에서 인간의 변화를 ‘호모 테크니쿠스(Homo Technicus)’의 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도구를 쓰는 인간, 기술을 발명한 인간은 인류 역사의 오래된 주제이지만, 인공지능 시대의 기술은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 그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AI는 노동을 대체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며, 지식과 정보의 생산 방식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기술을 소유하고, 누가 그 혜택을 나누어 가지는가’입니다.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새로운 빈곤을 만들어왔습니다. 산업혁명이 기계화된 풍요를 약속했지만, 동시에 도시 빈민과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낳았듯, AI 혁명도 또 다른 불평등의 지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빈곤은 단순히 물질의 부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난을 비참함으로 느끼게 하는 사회적 상황, 자기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권리의 결핍, 사회적 관계망의 붕괴,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빈곤까지도 포함합니다. AI는 일자리의 재편을 불러오면서 동시에 ‘쓸모없음’의 공포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이 기술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경제적 궁핍을 넘어 정체성의 빈곤으로까지 이어집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노동·작업·행위로 구분했습니다. 노동이 생존을 위한 활동이라면, 작업은 세계를 구축하는 힘, 행위는 타인과 관계 맺는 자유입니다. AI가 노동을 대신한다면, 인간은 더 많은 ‘행위’의 가능성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부의 분배는 협소해지고, 기술을 소유한 소수가 새로운 권력을 형성하면서 다수는 노동의 자리뿐 아니라 사회적 존엄까지 걱정하게 됩니다. 빈곤은 단순히 소득의 부족이 아니라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AI 시대에서 빈곤은 기술 접근권의 결핍, 그리고 분배 정의의 실패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호모 테크니쿠스’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기술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경쟁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인간적 가치를 확장하는 상상력입니다. 기술을 지배하는 인간이라기보다, 기술과 함께 자신을 새롭게 규정하는 인간일 것입니다.
이번 달부터 시작된 상지서울인문학아카데미 3기의 주제는 ‘빈곤’입니다. 가난이 왜 차별과 기회 상실의 반복으로 이어지는지, 기술이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할 것인지, 아니면 더 고독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불편하지만 함께 고민하고 공론화해야 할 ‘빈곤’에 대한 내용으로 총 9강을 진행합니다. 그 첫 강의는 ‘빈곤의 관점’으로 심한별 서울대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이 해주셨습니다. 강의는 유튜브에서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