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은 새로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예술작품이 왜 새로워야 하는지 잊지 않고 줄곧 질문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작품의 새로움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기괴함과 구분할 수 없다. 나는 저 기괴함이 싫다. 아니, 기괴함 자체가 아니라 그 기괴함을 위한 기괴한 시도가 싫다. 질문은 잃(잊)고 새로움 강박에 붙들려 기괴함으로 가는 예술작품은 곧잘 등장한다.
예술작품이 새롭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하고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나는 가끔 대책 없이 새로움에만 매달리는 예술작품을 만나곤 하는데, 거기서 감흥이나 마음의 반향이나 궁금증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우리가 이미 아는 익숙한 것과 낯설고 새로운 것이 섞여 있는 상태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움으로만 채워진 예술작품이 있다면, 우리는 그 예술작품을 알아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유행이 지났네 안 지났네, 새롭네 안 새롭네 하는 데는 관심을 덜 가지는 편이다. 대신 예술작품에 질문하는 태도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단언컨대 그 게 훨씬 낫다.
“우리는 왜 새로워야 하지?”
“새로움이란 어떤 거지?”
나는 『논어』를 읽고 이런 관점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논어』 팔일 편의 “자입태묘 매사문(子入太廟 每事問) 스승(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서는 매사를 물어보셨다.”라는 구절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려 한다.
누군가 그런 공자를 비웃었다.
“저 촌사람(공자)은 예를 좀 안다고 소문났는데 알고 보니 무식하군. 태묘에 들어가 하는 일마다 묻고 있잖아!” 그 소문을 듣고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원리‧이론으로는 잘 알지만 태묘의 실무에서는 익숙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예와 절차에 관한 모든 일을 거기서 일하는 전문가들에게 물었던 것이다) “바로 그게 예(禮)다.”
여기서 공자는 질문하면서 본질에 육박하는 태도를 잊지 않았다. 또 예(禮)란 윗사람이 먼저 지키면 간단히 정돈되는 ‘관계’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나는 이 부분을 읽다 감탄하며 무릎을 치고 말았다.